20240320_당신을 이 곳으로 데려와 달라는 부탁_KR
읽기란 눈을 통해 듣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읽기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글을 쓰는 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최대한 안전하게, 편안하게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문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고, 딱딱한 벽에 부딪히지 않고 찬 기운을 맞지 않도록 말이에요.
공간일리는 이곳 세검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얕은 물가의 홍제천을 끼고 있는 세검정은 다소 쓸쓸해 보이네요. 예전에는 현재 황망해 보이는 홍제천을 따라 거대 복합 상가인 신영 상가가 있었습니다. 1970년에 들어서 홍제천의 주요 구간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덮어버리는 복개 공사가 이뤄지면서 하천은 기능을 잃고 그 위로 신영 상가가 세워졌습니다. 어느 여름날, 신영 상가에 살던 친구 집에서 공포 영화를 봤던 게 문득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숨죽여 영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옆집의 텔레비전 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들렸어요. 긴 복도를 따라 여러 세대가 줄 지어 사는 거대 상가 안으로 들어가면 그 곳은 이 동네 속 자리 잡은 또 하나의 독립적인 동네처럼 보였습니다. 신영 상가는 약 20년 전 홍제천 복원 계획으로 철거되었습니다. 내부순환도로 교각이 건설된 이후 오염으로 건천이 돼버린 서대문구 홍제천은 펌프로 물을 끌어온 덕에 다시 생기를 찾고, 인공 폭포 주위로는 청둥오리와 백로도 보인다고 합니다.
여기 맞은 편으로 세검정 초등학교가 보입니다. 초등학교 후문 방향으로 나오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오래된 수선집, 문방구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아 100원 짜리 동전을 하나 넣고는 플라스틱 볼을 뽑았던 기억이 납니다. 문방구 옆에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300원이면 작은 종이컵에 가득한 떡볶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먹곤 했어요. 이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기름 떡볶이를 파는 집도 있었어요. 가게 이름이 ´평양 떡볶이´었나? 그 가게 주인이 북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있었어요. 우리는 거기서 떡볶이를 먹을 때면 주인아저씨 발음이 이상하다며 먹는 내내 주시하곤 했어요. 가게들이 옹기종기 줄 지어 있는 이 골목에 공간일리가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 가옥 구조를 가진 공간일리에 들어서면 문턱 하나가 나옵니다. 그 뒤로 또 하나의 문턱이 있네요. 우리는 두 개의 문턱을 넘어가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번역을 하겠습니다. 번역은 원전에 해당하는 출발언어를 그 사이에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도착언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독일어로 ´번역하다(übersetzen)´는 무언가를 어떠한 공간 혹은 제약을 넘어서(über-) 점유, 차지(setzen)하는-, 차지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역이란 모국어가 지닌 기존의 습관을 탈피하고, 장애물을 넘어 그 무언가를 다른 공간에 위치시키는 작업입니다. 제약을 넘는 데에 어떤 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언어,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번역 작업은 완벽한 번역을 목표하는 동시에 결국 그러한 시도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복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작가가 두 개의 문턱을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설치한 긴 문턱을 통해 얕은 경사를 매끄럽게 넘어가려고 합니다. 연장된 이 문턱은 우리를 다음 공간으로 이끌어주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따라 지나가면 사람들이 마당에 몰려 있을 거예요. 저녁 시간이 되면 길거리 여기저기 등장하는 말통을 본 적이 있나요? 말통이라 불리는 20리터 대용량 플라스틱 통은 양념, 세제, 기름과 같은 내용물이 소진되면 물로 채워져 거리를 홀로, 혹은 삼삼오오 끈에 묶여 점유합니다. 공영주차장 인근 일부 식당 주인들이 저녁 장사를 위해 말통으로 자리를 맡아 식당 전용 주차장처럼 사용하는 것이지요. 마치 그 말통들처럼 사람들이 마당을 소란스럽게 합니다. 평생 반복되는 것 같은 지하철 안내 방송, 홀로 기도하는 사람, 동행자와 떠드는 사람, 통화하는 사람, 재촉하는 걸음 소리, 버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 무언가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범벅이 되어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유의미 혹은 무의미한 질서와 혼돈, 분열과 합일, 실제와 가상, 이익과 손실, 믿음과 불신, 자유와 구속, 소망과 근심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루하며 권태로운 일상의 반복이면서 우리를 끈질기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 공명하는 장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도착했나요?
박나라 작가는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물리적인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작가의 부탁이 처음에는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지만, 그의 부탁, 제안 자체가 결국 작가의 의지이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 누군가와 동행하여 목적지를 계속해서 설정해 나가겠다는 표명일 것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발로 땅의 높이를 느끼는 것, 손으로 더듬어 감각하는 것, 자신의 모국어로 소통하는 것… 이러한 방법들은 단지 삶을 체화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출발언어에서 도착언어로 이행하는 길을 당신과 함께하면서 제게 분명해진 한가지는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을, 어떠한 시공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0240320_당신을 이 곳으로 데려와 달라는 부탁_KR
읽기란 눈을 통해 듣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읽기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글을 쓰는 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최대한 안전하게, 편안하게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문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고, 딱딱한 벽에 부딪히지 않고 찬 기운을 맞지 않도록 말이에요.
공간일리는 이곳 세검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얕은 물가의 홍제천을 끼고 있는 세검정은 다소 쓸쓸해 보이네요. 예전에는 현재 황망해 보이는 홍제천을 따라 거대 복합 상가인 신영 상가가 있었습니다. 1970년에 들어서 홍제천의 주요 구간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덮어버리는 복개 공사가 이뤄지면서 하천은 기능을 잃고 그 위로 신영 상가가 세워졌습니다. 어느 여름날, 신영 상가에 살던 친구 집에서 공포 영화를 봤던 게 문득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숨죽여 영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옆집의 텔레비전 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들렸어요. 긴 복도를 따라 여러 세대가 줄 지어 사는 거대 상가 안으로 들어가면 그 곳은 이 동네 속 자리 잡은 또 하나의 독립적인 동네처럼 보였습니다. 신영 상가는 약 20년 전 홍제천 복원 계획으로 철거되었습니다. 내부순환도로 교각이 건설된 이후 오염으로 건천이 돼버린 서대문구 홍제천은 펌프로 물을 끌어온 덕에 다시 생기를 찾고, 인공 폭포 주위로는 청둥오리와 백로도 보인다고 합니다.
여기 맞은 편으로 세검정 초등학교가 보입니다. 초등학교 후문 방향으로 나오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오래된 수선집, 문방구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아 100원 짜리 동전을 하나 넣고는 플라스틱 볼을 뽑았던 기억이 납니다. 문방구 옆에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300원이면 작은 종이컵에 가득한 떡볶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먹곤 했어요. 이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기름 떡볶이를 파는 집도 있었어요. 가게 이름이 ´평양 떡볶이´었나? 그 가게 주인이 북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있었어요. 우리는 거기서 떡볶이를 먹을 때면 주인아저씨 발음이 이상하다며 먹는 내내 주시하곤 했어요. 가게들이 옹기종기 줄 지어 있는 이 골목에 공간일리가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 가옥 구조를 가진 공간일리에 들어서면 문턱 하나가 나옵니다. 그 뒤로 또 하나의 문턱이 있네요. 우리는 두 개의 문턱을 넘어가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번역을 하겠습니다. 번역은 원전에 해당하는 출발언어를 그 사이에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도착언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독일어로 ´번역하다(übersetzen)´는 무언가를 어떠한 공간 혹은 제약을 넘어서(über-) 점유, 차지(setzen)하는-, 차지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역이란 모국어가 지닌 기존의 습관을 탈피하고, 장애물을 넘어 그 무언가를 다른 공간에 위치시키는 작업입니다. 제약을 넘는 데에 어떤 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언어,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번역 작업은 완벽한 번역을 목표하는 동시에 결국 그러한 시도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복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작가가 두 개의 문턱을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설치한 긴 문턱을 통해 얕은 경사를 매끄럽게 넘어가려고 합니다. 연장된 이 문턱은 우리를 다음 공간으로 이끌어주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따라 지나가면 사람들이 마당에 몰려 있을 거예요. 저녁 시간이 되면 길거리 여기저기 등장하는 말통을 본 적이 있나요? 말통이라 불리는 20리터 대용량 플라스틱 통은 양념, 세제, 기름과 같은 내용물이 소진되면 물로 채워져 거리를 홀로, 혹은 삼삼오오 끈에 묶여 점유합니다. 공영주차장 인근 일부 식당 주인들이 저녁 장사를 위해 말통으로 자리를 맡아 식당 전용 주차장처럼 사용하는 것이지요. 마치 그 말통들처럼 사람들이 마당을 소란스럽게 합니다. 평생 반복되는 것 같은 지하철 안내 방송, 홀로 기도하는 사람, 동행자와 떠드는 사람, 통화하는 사람, 재촉하는 걸음 소리, 버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 무언가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범벅이 되어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유의미 혹은 무의미한 질서와 혼돈, 분열과 합일, 실제와 가상, 이익과 손실, 믿음과 불신, 자유와 구속, 소망과 근심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루하며 권태로운 일상의 반복이면서 우리를 끈질기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 공명하는 장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도착했나요?
박나라 작가는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물리적인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작가의 부탁이 처음에는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지만, 그의 부탁, 제안 자체가 결국 작가의 의지이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 누군가와 동행하여 목적지를 계속해서 설정해 나가겠다는 표명일 것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발로 땅의 높이를 느끼는 것, 손으로 더듬어 감각하는 것, 자신의 모국어로 소통하는 것… 이러한 방법들은 단지 삶을 체화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출발언어에서 도착언어로 이행하는 길을 당신과 함께하면서 제게 분명해진 한가지는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을, 어떠한 시공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