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_Calling_KR
꿈에서 깨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태몽이 뭐였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태몽 있잖아. 나 태몽 꾼 것 같애. 난 아니고.
태몽?
응, 그니까 내 태몽 뭐였냐고.
내가 너 임신했을 때는 사과였지. 엄청 예쁘게 탐스럽게 생긴 사과. 그게 내 눈 앞에 떡하니 있는데 너무 갖고 싶어서 나무에서 따버렸지 뭐야.
너무 진부한데.
진부하고 뭐고 할 게 뭐 있어. 나는 그 꿈 꿨을 때 딱 알았다니까! 너 오빠는 호랑이였어. 새끼 호랑이. 내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라고- 하는데도 자꾸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 근데 너 무슨 꿈 꿨길래 그래?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건 태몽이 분명해. 붉은 꽃이라는 상투성은 쏘 코리안으로 자란 나는 아무리 오래 외국에 살아도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샤먼적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반증으로 느껴졌다. 어제를 떠올려봤다. 어제의 경험이나 며칠 전의 기억, 무의적인 생각들이 얽혀서 발생하는게 꿈 아닌가? 난 늘 숙면하는 사람이라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최근에 어디선가 이런 꽃을 본 적이 있던가? 봄이고 하니 사람들은 하나둘씩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길거리에도 화분 모종을 심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요즘이다. 무의식에 남겨져 있던 꽃이라면 내가 봤다고 하더라도 기억나지 않는게 당연하겠지. 내 친구 중 한 명은 복숭아였고, 또 한 명은 토끼였다. 특이하게 기억하는 것으로는 자라도 있었다. 온갖 꽃, 과일, 동물들이 등장하는 태몽은 그 대상을 의인화해서라도 꼭 이해하고 말겠다는 아름답고 인간적인 꿈이다.
고등학생의 신분이 끝나가던 무렵, 한 유망한 예술대학에 지원한 나는 1차 실기시험을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2차 시험의 형식은 매우 독특했다. 첫 45분 동안 박쥐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하는 사람이 미대 교수인지, 자연 동식물 분야에서 전문가인지 무엇인지 분별할 시간도 없이 빈 A4 용지 종이에 시험의 단서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15분의 쉬는 시간 동안 다음 시험에 대한 공지를 들었다.
박쥐가 보는 세상을 그리시오.
´청각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박쥐가 감각하는 세상´이란 인간적인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어떠한 라인도 없이 색연필 가루를 갈아 뭉게 손가락으로 비벼가며 종이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그림은 어떠한 컨셉없이 여러가지 색이 무분별하게 덕지덕지 발린 추상화가 되었다. 의인화를 피하고자 했지만 의인화를 제외하고나니 딱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일종의 포기였던 것 같다. 3차 시험에는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몇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토머스 네이글이 쓴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를 발견했다. 네이글의 이 사고실험은 의식을 다루는 연구에서 두루 인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다른 영장류와 비교하면 박쥐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생명 형태라고 네이글은 설명한다. 박쥐는 주로 음파 탐지 또는 반향 탐지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며, 범위 내에 있는 물체에서 나오는 빠르고 미묘하게 변조된 고주파 비명 소리를 감지한다. 이렇게 획득한 정보를 통해 박쥐는 거리, 크기, 모양, 움직임, 질감 등 시각에 필적하는 정밀한 구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쥐의 음파 탐지는 분명 지각의 한 형태이지만, 그 작동 방식이 인간이 가진 어떠한 감각과도 유사하지 않으며,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가정할 근거는 없다. 우리 자신의 경험은 상상의 기본 재료가 되기 때문에 상상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의 질문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박쥐가 지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박쥐가 박쥐인 것이 박쥐에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1
그 붉은 꽃은 태몽이었을까? 내가 아닌 이상, 내 주변 친인척 혹은 친구의 태몽을 내가 대신 꿔준 것일 수도 있다. 꿈에서 깨자마자 태몽인 것을 확신한 반면에, 여전히 의아한 점은 그 꽃이 상징을 기대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꽃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대가 변하듯 태몽도 변하는 걸까? 문화와 인식이 계속 변화한다면 태몽도 변할 수 있을까? 현대적 태몽은 이러할 것이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창문 너머로, 하늘에서 수많은 불꽃들이 아래를 향해 여행한다. 땅은 위쪽을 향하는 신호로 반응한다.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인사와 위로 향하는 응답들 중 하나가 만나게 될 때, 강력하고 눈부신 번개가 온 세상을 뒤덮는다. 3초 뒤, 굉음이 들리고 빗방울이 떨어진다.2 그리고 모든 빗방울의 모양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보인다.
지난 밤 꿈을 다시 되새겨볼수록 그 꽃은 의인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은 실체 같았다. 그 꽃을 단어를 엮어 말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연속적인 세계를 불연속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에는 늘 한계가 있다. 그 꽃을 굳이 설명하자면 코유콘의 방식을 따라야할 것 같다. 알래스카 원주민 코유콘은 동물의 이름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부른다. 그들은 여우가 아닌 '덤불 사이를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부엉이가 아닌 '가문비나무 아래 가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비가 아닌 '여기저기 펄럭이는 것'을 보고, 물수리가 아닌 '물속을 응시하는 것'을 본다. 코유콘 사람들이 동물에게 부여하는 이름은 동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 창조에 대한 옛날 이야기 혹은 수수께끼에 기반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동물을 부른다는 것은 동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3 어떤 대상에 대해 명사로 라벨링하지 않고 다양한 동사로 부르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존재적으로는 하나, 단지 그 형태가 다양함을 인정하는 길일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가 품고 있는 이질성 때문에 결국 서로 유사하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그 꽃에 대해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
먹고 씹고 자른다.
말하고 울고 짖는다.
위로하고 압박한다.
자라나고 고꾸라진다.
군집하여 교란하고, 전염시켜 결정한다.
경쟁하고 의존한다.
공전하는 이 은하계의 속도 안에는 애초에 자기 이름, 자기 자리라는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본 건 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는 영영 다시 돌아가지 못해서 우리는 서로의 꿈에나 출현하는 그런 존재다.
Thomas Nagel, What is it like to be a bat?, From the philosophical Review LXXXIII, 1974
Karen Brad, Nature´s Queer Performativity, Duke University Press, 2011
Tim Ingold, Being Alive: Essays on Movement, Knowledge and Description, Routledge, 2011
20240430_Calling_KR
꿈에서 깨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태몽이 뭐였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태몽 있잖아. 나 태몽 꾼 것 같애. 난 아니고.
태몽?
응, 그니까 내 태몽 뭐였냐고.
내가 너 임신했을 때는 사과였지. 엄청 예쁘게 탐스럽게 생긴 사과. 그게 내 눈 앞에 떡하니 있는데 너무 갖고 싶어서 나무에서 따버렸지 뭐야.
너무 진부한데.
진부하고 뭐고 할 게 뭐 있어. 나는 그 꿈 꿨을 때 딱 알았다니까! 너 오빠는 호랑이였어. 새끼 호랑이. 내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라고- 하는데도 자꾸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 근데 너 무슨 꿈 꿨길래 그래?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건 태몽이 분명해. 붉은 꽃이라는 상투성은 쏘 코리안으로 자란 내가 아무리 오래 해외에 살아도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샤먼적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반증으로 느껴졌다. 어제를 떠올려봤다. 어제의 경험이나 며칠 전의 기억, 무의적인 생각들이 얽혀서 발생하는게 꿈 아닌가? 난 늘 숙면하는 사람이라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최근에 어디선가 이런 꽃을 본 적이 있던가? 봄이고 하니 사람들은 하나둘씩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길거리에도 화분 모종을 심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요즘이다. 무의식에 남겨져 있던 꽃이라면 내가 봤다고 하더라도 기억나지 않는게 당연하겠지. 내 친구 중 한 명은 복숭아였고, 또 한 명은 토끼였다. 특이하게 기억하는 것으로는 자라도 있었다. 온갖 꽃, 과일, 동물들이 등장하는 태몽은 그 대상을 의인화해서라도 꼭 이해하고 말겠다는 아름답고 인간적인 꿈이다.
고등학생의 신분이 끝나가던 무렵, 한 유망한 예술대학에 지원한 나는 1차 실기시험을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2차 시험의 형식은 매우 독특했다. 첫 45분 동안 박쥐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하는 사람이 미대 교수인지, 자연 동식물 분야에서 전문가인지 무엇인지 분별할 시간도 없이 빈 A4 용지 종이에 시험의 단서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15분의 쉬는 시간 동안 다음 시험에 대한 공지를 들었다.
박쥐가 보는 세상을 그리시오.
´청각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박쥐가 감각하는 세상´이란 인간적인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어떠한 라인도 없이 색연필 가루를 갈아 뭉게 손가락으로 비벼가며 종이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그림은 어떠한 컨셉없이 여러가지 색이 무분별하게 덕지덕지 발린 추상화가 되었다. 의인화를 피하고자 했지만 의인화를 제외하고나니 딱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일종의 포기였던 것 같다. 3차 시험에는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몇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토머스 네이글이 쓴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를 발견했다. 네이글의 이 사고실험은 의식을 다루는 연구에서 두루 인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다른 영장류와 비교하면 박쥐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생명 형태라고 네이글은 설명한다. 박쥐는 주로 음파 탐지 또는 반향 탐지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며, 범위 내에 있는 물체에서 나오는 빠르고 미묘하게 변조된 고주파 비명 소리를 감지한다. 이렇게 획득한 정보를 통해 박쥐는 거리, 크기, 모양, 움직임, 질감 등 시각에 필적하는 정밀한 구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쥐의 음파 탐지는 분명 지각의 한 형태이지만, 그 작동 방식이 인간이 가진 어떠한 감각과도 유사하지 않으며,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가정할 근거는 없다. 우리 자신의 경험은 상상의 기본 재료가 되기 때문에 상상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의 질문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박쥐가 지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박쥐가 박쥐인 것이 박쥐에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1
그 붉은 꽃은 태몽이었을까? 내가 아닌 이상, 내 주변 친인척 혹은 친구의 태몽을 내가 대신 꿔준 것일 수도 있다. 꿈에서 깨자마자 태몽인 것을 확신한 반면에, 여전히 의아한 점은 그 꽃이 상징을 기대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꽃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대가 변하듯 태몽도 변하는 걸까? 문화와 인식이 계속 변화한다면 태몽도 변할 수 있을까? 현대적 태몽은 이러할 것이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창문 너머로, 하늘에서 수많은 불꽃들이 아래를 향해 여행한다. 땅은 위쪽을 향하는 신호로 반응한다.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인사와 위로 향하는 응답들 중 하나가 만나게 될 때, 강력하고 눈부신 번개가 온 세상을 뒤덮는다. 3초 뒤, 굉음이 들리고 빗방울이 떨어진다.2 그리고 모든 빗방울의 모양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보인다.
지난 밤 꿈을 다시 되새겨볼수록 그 꽃은 의인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은 실체 같다. 그 꽃을 단어를 엮어 말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연속적인 세계를 불연속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에는 늘 한계가 있다. 그 꽃을 굳이 설명하자면 코유콘의 방식을 따라야할 것 같다. 알래스카 원주민 코유콘은 동물의 이름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부른다. 그들은 여우가 아닌 '덤불 사이를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부엉이가 아닌 '가문비나무 아래 가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비가 아닌 '여기저기 펄럭이는 것'을 보고, 물수리가 아닌 '물속을 응시하는 것'을 본다. 코유콘 사람들이 동물에게 부여하는 이름은 동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 창조에 대한 옛날 이야기 혹은 수수께끼에 기반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동물을 부른다는 건, 곧 동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3 어떤 대상에 대해 명사로 라벨링하지 않고 다양한 동사로 부르는 건 결국 모든 것을 존재적으로는 하나, 단지 그 형태가 다양함을 인정하는 길이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가 품고 있는 이질성 때문에 결국 서로 유사하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그 꽃에 대해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
먹고 씹고 자른다.
말하고 울고 짖는다.
위로하고 압박한다.
자라나고 고꾸라진다.
군집하여 교란하고, 전염시켜 결정한다.
경쟁하고 의존한다.
공전하는 이 은하계의 속도 안에는 애초에 자기 이름, 자기 자리라는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본 건 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는 영영 다시 돌아가지 못해서 우리는 서로의 꿈에나 출현하는 그런 존재다.
Thomas Nagel, What is it like to be a bat?, From the philosophical Review LXXXIII, 1974
Karen Brad, Nature´s Queer Performativity, Duke University Press, 2011
Tim Ingold, Being Alive: Essays on Movement, Knowledge and Description, Routledge,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