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제 친구가 건네준 말, 일기에 흘러든 단상, 한 편의 드라마 속 익숙한 서사, 광고의 짧은 문구, 웹상에 남겨진 긴 댓글, 사실처럼 번져가는 가짜 뉴스, “구석기 시대에는 그랬다더라” 하는 소문까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모으고, 기록한다. 그것은 필드 리서치의 기록일 때도 있고, 데이터의 아카이빙일 때도 있으며, 소리와 이미지의 조각으로 남기도 한다.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 같은 사건도 누가, 어디서, 언제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남는다. 기억은 쉽게 흔들리고, 감정은 사실보다 먼저 반응하며, 현실은 언제나 겹겹이 갈라져 있다. 역사가 섞여 흐르고, 시간이 엇갈린다면, 역사를 설명하는 형식이나 그 필연성은 결국 허상에 가깝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발화하게 할지, 무엇을 침묵시킬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증거를 모으고, 가능한 한 충실하게 기록하는 일. 그렇게 창작은 다시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주라는 초국적 흐름, AI 트레이너나 플랫폼 노동 같은 새로운 직업들, 기술에 매개된 정체성과 신체의 위치, 알고리즘이 직조하는 감정의 결까지 — 이 모든 것들은 현재를 어떤 이야기로 엮어낼 것인가를 묻는 새로운 서사의 단초들이다. 최근 나는 ‘AI 트레이너’라는 직업군에 주목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사회적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감정 노동과 윤리 훈련이 어떻게 기술과 얽혀 있는지를 추적한다. 자동화라는 말 뒤에 가려진 노동, 기계의 응답을 가름하는 인간의 판단, 그 교차점에서 드러나는 윤리와 기술의 접면을 바라본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들을 통계나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의 형태로 엮고 싶다. 이야기 속에서 노동의 형식, 감정의 표정, 타인과의 거리, 시간의 감각이 드러난다. 그것을 ‘고현학적 시선(archaeology of the present)’이라 부르며, 지금을 낯선 과거처럼 다루려 한다. 고고학자가 오래된 땅과 파편에서 삶과 믿음을 추적하듯,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언어와 이미지, 감정과 구조를 미래의 유물로 기록한다.
이렇게 수집되고 뒤섞인 자료들은 더 이상 허구로 위장할 필요가 없다. 그것 자체로 이미 현실을 이루는 하나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제 친구가 건네준 말, 일기에 흘러든 단상, 한 편의 드라마 속 익숙한 서사, 광고의 짧은 문구, 웹상에 남겨진 긴 댓글, 사실처럼 번져가는 가짜 뉴스, “구석기 시대에는 그랬다더라” 하는 소문까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모으고, 기록한다. 그것은 필드 리서치의 기록일 때도 있고, 데이터의 아카이빙일 때도 있으며, 소리와 이미지의 조각으로 남기도 한다.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 같은 사건도 누가, 어디서, 언제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남는다. 기억은 쉽게 흔들리고, 감정은 사실보다 먼저 반응하며, 현실은 언제나 겹겹이 갈라져 있다. 역사가 섞여 흐르고, 시간이 엇갈린다면, 역사를 설명하는 형식이나 그 필연성은 결국 허상에 가깝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발화하게 할지, 무엇을 침묵시킬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증거를 모으고, 가능한 한 충실하게 기록하는 일. 그렇게 창작은 다시 현실을 만들어낸다.
지금 나를 사로잡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곧 ‘현대’다. 이주라는 초국적 흐름, AI 트레이너나 플랫폼 노동 같은 새로운 직업들, 기술에 매개된 정체성과 신체의 위치, 알고리즘이 직조하는 감정의 결까지 — 이 모든 것들은 현재를 어떤 이야기로 엮어낼 것인가를 묻는 새로운 서사의 단초들이다.
최근 나는 ‘AI 트레이너’라는 직업군에 주목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사회적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감정 노동과 윤리 훈련이 어떻게 기술과 얽혀 있는지를 추적한다. 자동화라는 말 뒤에 가려진 노동, 기계의 응답을 가름하는 인간의 판단, 그 교차점에서 드러나는 윤리와 기술의 접면을 바라본다.
나는 이런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들을 통계나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의 형태로 엮고 싶다. 이야기 속에서 노동의 형식, 감정의 표정, 타인과의 거리, 시간의 감각이 드러난다. 그것을 ‘고현학적 시선(archaeology of the present)’이라 부르며, 지금을 낯선 과거처럼 다루려 한다. 고고학자가 오래된 땅과 파편에서 삶과 믿음을 추적하듯,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언어와 이미지, 감정과 구조를 미래의 유물로 기록한다.
이렇게 수집되고 뒤섞인 자료들은 더 이상 허구로 위장할 필요가 없다. 그것 자체로 이미 현실을 이루는 하나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다.